젠성합작에 참여했던 글입니다. (^ㅁ^)
씹는 버릇이 있다. 손톱이나 거스러미도 아니고 입술 안쪽의 가려진 살이었다. 불안하다거나 답답할 때 나오는 스트레스성 습관이 아닌 어느 순간 호기심에 의해 물어봤다 만들어진 일종의 버릇이라고 박지성은 생각했지만, 사실 스트레스성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스트레스. 네이버에 치면 이렇게 나왔다.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ㆍ신체적 긴장 상태. 장기적으로 지속 되면 심장병 위궤양이 될 수도 있고 우울증 신경증 따위의 정신병도 된다고 했다.
어쩌구 신체적 질환과 어쩌구 정신적 질환 같은 건 없었다. 신체적으론 살면서 고열 한 번 앓아본 적 없이 튼튼했고 정신적으론 글쎄, 솔직히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안 걸려봤으니 추측이지만. 나는 내가 제일 잘 알잖아. 아니 사실 잘 모르는데 하여튼 안 걸릴 것이다. 박지성은 반쯤 확신했다. 이만큼 살면서 건강히 지냈으면 앞으로도 안 걸릴 거라고. 진짜 좆되게 힘들었을 때도… 존나 버틴다는 의지만 다졌을 뿐이었다. 존나존나존나 버틴다. 존나 버텨. 포기는 없었다. 그런 건 배추 셀 때나 쓰는 거랬다. 박지성은 잘 살고 싶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서 박지성은 종종 생각했다. 연 끊을 때 쓰는 말도 잘 살아. 싹둑 잘린 연을 이어 붙일 때 쓰는 말도 잘 살아? 뒤에 붙은 물음표 하나로 끊기거나 이어지거나 했다. 단순한 것 같은데 단순하지도 않았다. 잘 살라고 말했을 때 진정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몇 없었다. 속뜻은 아주 잘 살아봐라 시발롬아 였다. 잘 사냐고 물어볼 때 또한 진짜 나 없이 잘 살았냐 시발롬아인 경우가 많았다. 거의 다 겉치레였다. 박지성은 아직 진심으로 잘 살기를 바라주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다. 살짝 슬픈 것도 같았고 짜증도 났으나 인복 없는 건 사주에 뭐라 할 일이었다.
하필이면 씹는 버릇. 박지성은 혀로 아랫입술 오른쪽 부근 어딘가를 계속 문댔다. 촉촉해지면 앙 물고 있었다. 통통하게 들어차는 살을 가만 물고 민증을 털고 있었다. 6시간에 만원으로 대충 고만고만한 가격인 신촌 찜질방에서 남들 다 자는 으슥한 시간에 화장실 다녀오는 척 일어났다. 그러다가 다른 자리에 슥 누워서 척 하고 빼돌리는 개천재적인 능숙함으로 두 시간 사이에 세 개나 얻었다. GS25 편돌이 박지성의 은밀한 본업이었다. 그대로 몸을 데구르 돌려 멀어진 뒤 엎드려 누워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민증 #주민등록증 #민증판매 민증 팔아요 많으니까 닮은 사람으로 골라가면 됨 1장에 5만원 오픈카톡이 빠릅니당.
와 있는 디엠엔 대충 오픈카톡 주소를 넘겨주고 오픈카톡은 무서운 형아 같아 보이면 걸렀다. 만났다가 된통 다 털린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진심 양아치 새끼들. 지옥 갈 새끼들. 환생하면 돌로 태어날 새끼들. 너무 화나서 경찰서에 신고하고 싶었는데 박지성도 훔쳐다가 팔려고 했던 것이므로 자수하는 셈이었다.
문제는 다음 날 아침 샤워까지 깨끗하게 하고 만난 사람이 경찰이었다. 아 헐 미친. 중딩인 줄. 박지성은 좆 됐음을 깨닫자마자 달음박질쳤다. 드라이기로 바짝 말리고 온 머리가 앞머리에 달라붙을 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그런데 빌어먹을 운이 안 좋았는지 발을 헛디뎌서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박치기하는 순간 입술을 콰득 씹었다. 살점이 떼어지는 소리가 입에서부터 머리까지 찡하게 울렸다. 박지성은 피를 철철 흘리면서 연행됐다. 침 뱉으면 싸가지 없게 뭐하는 짓이냐고 뒤통수를 때릴 것 같아서 피를 꼴딱꼴딱 삼켰다. 차라리 아예 죄다 흘려 불쌍하게라도 보일걸. 응고된 피가 칼칼하게 뒤덮은 목이 꺼끌거렸다.
초범이 아닌 데다가 가지고 있던 가방에서 튀어나온 귀금속으로 일대 자잘한 도난들이 까발려지면서(물품이 자잘했다는 거지 가격까지 자잘하진 않았다) 벌금이 자그마치 팔천만이었다. 팔천만. 8000만 원. 박지성이 수중에 가진 돈이라곤 끽해야 다음 달 월세 20에 보증금 100과 생활비 40이 다였다. 도합 160만 원. 당장 일주일 동안 노가다를 뛰어도 팔천만은 못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합의금 못 드릴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박지성은 순순히 실형을 받았다. 가진 게 없으면 줄이라도 그여야 되는 거랬다. 등신븅신 인생 같이 나누며 필요할 땐 만 원씩 빌려주던 형이 했던 말이다. 그 형은 등신븅신 인생 접고 집 들어갔는데 박지성은 들어갈 집이 없었다. 조실부모는 아니고 말하자면 복잡했다. 부모의 이혼과 새아빠 그리고 그에 따른 차별 등등 개개개구린 클리셰… 약간 아침 드라마적인 요소가 팍팍 묻어있는 사연을 가진 탓이었다.
박지성은 7번 방의 선물에서 콩밥 나올 땐 별생각 안 들었으면서 막상 본인이 들어간다고 하니까 엽떡이 무지무지 먹고 싶었다. 후에 사식 넣어줄 사람 한 명 없는 고독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1년간 강제 금떡 행이었다. 영치금 넣어줄 사람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백팔십 그대로 통장에 처박은 다음 교도소 모범수 딱지 붙을 때까지 1년 동안 죽어라 일해야 했다. 박지성은 다짐했다. 시발 버티자. 1년은 금방이다. 금방 지나간다. 지나가면 다시 시작하자. 이번엔 제대로 카페 알바를 하고 떨어진 민증만 줍자! 이제 갓 스무 살이어서 좀, 반성을 미루는 편이었다.
교도소 들어가는 날엔 정말로 할 게 없었다. 손목에 수갑을 채우는 형사님 손이 너무 다부져서 악 아파요 엄살 피웠다가 더 세게 잡혔다. 아 진짜 아픈데… 손목을 빙 돌려 엄살 피운 뒤 해주는 행동 1을 하고 싶었으나 차갑고 딱딱한 쇠고랑만 절그럭거리며 존재감을 자랑했다.
가는 버스에선 나중엔 뭐 하고 살지를 고민했다. 결론적으로 역시 민증 되팔기가 개꿀알바였다. 짱이었다. 민증 또 훔치면 진짜 1년 이상 실형 받을 것 같았지만, 그럼 집 하나 없는 스무 살 출가 성인이 어떻게 먹고 살라는 말인가. 트위터에서 본 개저틀딱들처럼 정부를 향한 비난을 쏟아내며 박지성은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났을 땐 의정부 부대찌개 집이 보였다. 그래서 아 맞다 의정부 교도소로 온댔지, 했다. 부대찌개 내 취향 아니니까 출소하면 베라 사 먹어야지. 그것도 생각했다. 베라와 엽떡. 도난과 돈벌이. 부대찌개와 교도소. 찢어진 입술과 아물어 가는 중의 고통. 스무 살이 감당하기에 적절한 것들과 약간은 비틀린 것들을 품에 껴안은 채로. 박지성은 깜방 생활을 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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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저 형은 진짜 양심이라는 게 없나?
밥그릇에 담아 놨던 소세지를 막 털린 박지성이 드글드글 끓는 속으로 42세 금왕욱을 노려봤다. 어쭈 뭘 봐 인마. 니는 성장기니까 콩 많이 먹어라. 금왕욱은 이딴 걸 사람 먹으라고 만든 거냐며 금방 전까지 오지게 성질내던 콩자반을 박지성 앞으로 밀어줬다. 깜방 생활만 3회차라는 금왕욱은 사람이 아주 십새끼였다. 밥 가지고 차별하는 게 제일 서러운 건데 맛있는 건 지랑 지 형님들 다 나눠 먹고 막내 박지성한텐 콩자반 같은 거나 실컷 먹으라며 밀어주고 그랬다.
“왕욱아 애 울겠다. 저 봐라 니도 나중에 찜방에서 민증 털리는 수가 있다. 얘는 뭐 저런 얼굴로 금은방을 털고 다녔대.”
“얘가 훔친 것만 순수 천 오백이라 안 합니까. 뒤집어 놨다매요. 이런 얼굴 하고 다니는 새끼들이 젤 무섭고 젤 드러운 짓 많이 해요, 귀엽게 생겨가지고. 퍽 털고 훅 털고 으잉? 맞제.”
금왕욱 옆에 드러누운 호식이 아저씨가 손톱을 둑 둑 물어뜯었다. 대마 피우다가 걸려 들어온 호식이 아저씨는 눈 밑이 맨날 퀭했다. 진짜 어느 정도 퀭했냐면 팬더 수인인 줄 알았다. 박지성은 입소 첫날부터 찍히고 싶진 않아서 알아서 기었지만, 늘 호시탐탐 혹시 조상 중에 팬더 있냐고 미친 척 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여. 박지성 니 여기에서도 뭐 털면 진짜 혼난다. 이제노가 쩌어기 산책할 때 끌고 가서 원 펀치 쓰리 강냉이 딱딱딱. 어? 깡패 쉐이들 두목 형아가 정의의 이름으로 널 가만 안 둬.”
일찍 밥을 먹고 벽에 기대어 앉아 가만히 책을 읽던 이제노가 고개를 들었다. 저 왜요? 씩 웃는 얼굴을 동시에 보던 감방 십새끼 가족들이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니는. 두목 형아야고 뭐고 이빨 빠진 호랑이다 쟨. 박지성도 이제노를 봤다. 들어 올린 고개와 스르르 차분하게 가라앉는 머리카락 같은걸. 감방 안에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미모를 감상했다. 아닌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는 않나. 확실히 영치금은 팍팍 들어오는 것 같다던데 전여친들일 수도 있으니까. 대답하느라 멈췄던 이제노의 손이 다시금 움직였다. 건축기능사 자격증 책자의 노란 종이가 핏줄 선 손에 의해 한 장씩 넘어갔다. 이제노는 두 번 묻지 않았다. 아닌 거면 아닌 거구나 하고 또 밍숭맹숭 싱거운 반응을 했다.
그리고 박지성은 이제노의 비밀을 알았다.
비밀. 박지성은 솔직히 비밀도 없었다. 숨길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입소 첫날 자기소개 좀 해보라는 감방 가족들 앞에서 아 저 민증이랑 도난 조금… 얼버무렸는데 십새끼 가족들은 겁먹은 얼굴이랑 낯 가리는 얼굴조차 구분 못 하는 개멍청눈깔들이라 애기 겁먹었다며 신고식도 안 치르고 넘어가 줬다. 박지성이야 땡큐땡큐 대박감사였다. 화장실 변기에 머리 처박힌다는 썰을 얼핏 들었었다. 여기 마음대로 씻지도 못하는데, 그 더러운 거에 머리카락을 빨아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제노는 박지성보다 4개월 먼저 들어왔댔다. 스물두 살이었다. 너무 잘생겨서 마약 하고 들어온 아이돌인 줄 알았는데 연예계 종사자도 아닌 일반인이랬다. 금왕욱은 묻지도 않은 걸 줄줄 늘어놨다. 경북 구미 알지 구미, 마이구미 공장 없는 구미. 거기 일대를 싹 뒤져가지고 깡패쉐이들 뒤에 딱 이끌고 여기저기 차차차. 도망치는 놈들 잡아다가 퍽퍽퍽. 그러다가 한 놈 피떡 만들어서 들어왔다잉. 지가 이제노도 아니면서 이제노 사정을 더 잘 아는 것처럼 굴었다. 이제노는 말을 보태거나 더는 일 없이 웃기만 했다. 맞제? 묻자 표정 변화 없이 맞아요 대답하며. 감흥 없이 굴었다. 그래서 이제노 별명은 바위였다. 밀 수는 있어도 들 수는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다고. 가만히 자리를 지킨다고. 마치 그런 재미없는 사건들과 이런 밀폐된 곳에 익숙한 사람처럼.
그러니까 박지성이 아는 이제노의 비밀은 너무너무너무 크고 이상하고 정말 기묘한 것이라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생각은 가능했다. 설마 이제노가 생각까지 읽을까? 그건 아니어야 한다. 무조건. 왜냐면 이제노는, 외계인이다.
목공 작업 중이었다. 버릴 나무판자가 쌓여서 소각로로 가는데 코너를 도는 순간 교도관이 시발 얼굴을 떡 들이밀고 있어서 뻥 안치고 심장이 잠깐 멈춘 듯 쾅 했다. 아 씨바! 와락 엉덩방아를 찧어 주저앉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교도관은 멈춰 있었다. 불법 다운로드 한 영화 보다가 스페이스 바 눌러서 재생 멈췄을 때 같았다. 버벅거린 채로 미동이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주춤주춤 일어난 박지성이 발끝으로 교도관 무릎을 툭툭 쳤다.
“와 깜짝이야 진짜. 와, 무슨 여기에. 소, 송교도관님?”
짱구는 못말려 공포 에피소드 중에 유치원 사람들 전부 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게 설마 그거? 박지성은 세상에 ‘말도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우주가 그렇게 넓다면 뭐가 어떻게 돼도 말은 된다고. 그러므로 박지성이 넘어지는 동시에 놓쳐버린 나무판자를 주워들다 이제노랑 눈이 마주친 것, 이제노가 존나 당당하게 담배를 처빨고 있는 것도 말이 됐다. 이해는 좆도 안 됐지만.
“아……”
난감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인 이제노가 인상을 썼다. 찌푸렸던 미간을 풀면서 담뱃재를 툭툭 털고 신발 밑창으로 지졌다. 왼손에 들린 필라멘트는 송교도관 담배였다. 박지성은 시발 이게 뭔 일이지 싶었다. 그 다음으론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방 쓰는 사람만 아니었어도 우와 즐담하세요 이러고 냅다 튀었을 텐데 하필이면 같은 방이어서, 와 진짜 큰일났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타오르는 불길도 연기도 멈춰 있었다. 네모네모 로직으로 쪼개진 세상 한 부분이 정지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어, 형, 저 이거 갖다 놓으려구… 하던 거 마저 하세여.”
“응.”
박지성은 당장이라도 후덜거리다가 털썩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이끌고 소각로까지 갔다. 팔까지 진동 모드였다. 덜덜덜덜덜덜덜덜. 타오르지도 않는 불에 나무판자를 던져 넣었다. 쌩쇼였다. 이거 내팽겨치고 도망갔다가 송교도관님처럼 굳어서 돌 되면 어떡해. 그때 박지성은 아무렴 좋으니까 1년 안전히 감방 생활하고 출소하는 걸 목표로 정했다.
나무판자를 몽땅 소각로에 던져 놓고 타지도 재가 되지도 않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수고하세여 형. 자연스럽게 인사까지 했다. 이 정도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냅둬야 하는 거잖아. 내가 초능력자에 나오는 강동원이었어도 불쌍해서 봐 준다. 그런데 이제노는 아니었나 보다. 박지성을 불렀다. 맞아요, 하고 왕욱이 형에게 대답하던 심드렁한 목소리랑 같았다.
“오는 데 무거웠겠다. 왜 혼자 왔어?”
“네? 앗… 오늘 작업 밀려서, 바빠가지고, 근데 저는 아직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아아. 한 대 피울래?”
“아니요, 저 비흡연자예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제노가 정말? 되물었다.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나 어리게 생겼다고 알바 사장님들은 민증 검사까지 하는데… 말 붙이지 않고 박지성은 그냥 고개나 끄덕였다.
이쯤 되면 뭐가 그렇게 느리냐고 교도관이 올 법도 했으나 주변은 고요했다. 진짜로 이곳의 시간이 멈췄거나 교도관들이 나를 탈옥할 깡도 없는 개찌질이로 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박지성은 결론 내렸다. 전자일 것 같았다. 느낌이 그랬다. 이 상황은 이제노가 초인류 외계인이 아니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노는 벽에 비스듬히 기대 있었다. 존나 무섭게. 가만히 있는데 무슨 인터넷 소설 주인공처럼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너무 뜨거운 불은 파랗다고 했던가. 냉기인지 온기인지 살기인지 알게 뭐람. 박지성은 닥치고 무릎부터 바닥에 박을지 고민했다.
저 죽나요? 그러자 들려오는 대답. 내가 널 왜 죽여? 홀린 듯이 얼굴을 들어 올리니까 이제노는 웃었다. 나 네 말대로 하던 거 마저 할까? 박지성은 있는 힘껏 고개를 저었다. 헐 진짜 절대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송교도관님 저렇게 해놨으면 이젠 멈춰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담배 불씨를 벽에 지져 끈 이제노가 소각로 앞에 멀뚱히 서 있던 박지성에게로 다가왔다. 꿀꺽 침을 삼켰다. 숨을 헙, 들이마시니 이제노가 소각로에 담배를 던져 넣고선 박지성을 바라봤다.
“말 안 할 거지? 해 봤자 소용없을걸. 정신과 진료받고 초코파이 받고 싶으면 말해도 돼.”
“……본 게 없는데 무슨 말을 해요.”
“아 진짜? 본 게 없어?”
한 차례 소리 내어 웃던 이제노는 넘어져 먼지 묻은 박지성의 셔츠 자락을 털어주면서 그렇구나, 했다. 본 게 없어서 다행이네. 무미건조한 반응이었다. 엉거주춤한 자세의 송교도관과 불씨와 연기 따위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박지성은 이게 꿈인가 싶었다. 이대로 넘어간다니. 이제노 형 사실 엄청 착한 외계인이거나 초능력자거나 그런 걸까.
털어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해도 되는데, 그럼 전 이만…. 빠르게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던 박지성은 이제노의 손목을 잡아 허리춤 옆에 고이 붙여드렸다. 이제노는 그러라며 자기도 금방 가겠다고 얘기했다. 존나 정체가 뭐야. 암튼 살려주셔서 감사.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어야 되는데 이제노가 뒤통수에 대고 중얼거린 말을 듣자마자 박지성의 발은 땅바닥에 초강력본드라도 발라놓은 듯이 멈춰버렸다.
말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둘 다 곤란해지잖아.
확실히 깡패 쉐이들 여럿 달고 다니며 이리 퍽 저리 퍽 하던 새끼라 그런지 협박을 기가 막히게 했다.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박지성은 인생 통틀어 그날 자신의 범죄를 가장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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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종교 행사도 있었다. 목사님 스님 한마음 한뜻으로 찾아와 초코파이랑 요구르트 무나하는 행사였다. 이것도 기도 잘 하고 스님 말씀 잘 들어야 줬다. 무언가라도 깨달은 것처럼, 회개하는 것처럼 노호혼마냥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실상 깨닫는 건 쥐뿔도 없고 기름걸레로 박박 닦아 미끈해진 바닥이나 쳐다보는 건데. 그 바닥 보면서 다음 범죄는 철두철미하게 하자고 스스로 손깍지 거는 사람만 한 트럭인데. 하여튼 그랬다. 십새끼 천국, 십새끼 세상에서, 목사님은 예수 믿으며 착하게 살라 어쩌구를 강조했고 스님은 육도윤회라는 게 있다며 다음 생엔 가축으로 태어날 수도 있으니 미리 착하게 살아 어쩌구를 주장했다. 박지성은 한 번 가본 뒤론 안 갔다. 방에서 쉬는 편이 나았다.
박지성네 방인 <라>호에서 짭회개 행사 안 가는 건 박지성과 이제노 뿐이었다. 휑한 방에서 박지성은 제과제빵 자격증 책을 잠깐 들척여보다가 접었다.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았다. 이걸 언제 따서 언제 써먹어. 빵은 사먹는 편이 좋았고 만드는 데엔 영 관심이 없었다. 이제노는 건축기능사 자격증 책을 거의 끝내가는 중이었다. 단번에 붙을 거라고 모두가 확신했다. 교도관들은 이제노 기도 한번 없이 회개했다며 킬킬거렸다. 종교 행사 한 번을 안 가봤다는 인간. 아니 외계인.
외계인인 걸 알고 있어서 말 걸기가 약간 망설여졌으나 박지성은 궁금해진 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양반 다리를 풀고 다리를 주무르며 슬쩍 물었다. 형은 왜 안 가요? 책을 덮은 이제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물은 거야?”
“어… 네. 아 대답 안 해주셔도 돼요. 진짜.”
“아니 그냥, 네가 나 불편해하는 티를 너무 많이 내서 말 안 걸 줄 알았지.”
“앗.”
티가 났구나. 머쓱하게 입술을 물자 그걸 모를 순 없을 걸,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걸 모를 순 없다니. 그렇게 티가 났나. 금왕욱 말대로 퍽 털고 훅 털고 하면 아무도 몰랐다. 민증도 그랬다. 슬쩍 해서 주머니에 휙 넣고 다음 날 슉 팔고 일사천리로 처리해서 돈을 벌었다. 박지성은 그렇게 살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아무런 짓을 하고 다녔다. 죄책감은 물론 있었다. 그러나 박지성은 본인 삶 영위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일단 살려면 우선 저질러야 했고 순간은 버텨야 됐다. 2년을 버텼고 이번엔 좀 잘살아 보려고 했다. 훔친 거 다 팔고. 편하게, 하루를 무의미하게 날려 먹어도 괜찮게.
“일회성으로 믿는 척하는 거 싫어. 신도 사후도 천국도 안 믿는데 잠깐 믿는 척하기 싫어서 안 가. 거짓말 같잖아.”
진짜 진지하고 재미없다. 그런 감상평과 별개로 좀 멋있는 것 같기도 해서, 박지성은 아 글쿠나 이랬다. 아 글쿠나 형은 외계인이라서 안 믿는 거군요. 하긴 외계인이 뭐 믿고 그러는 게 이상하기도 하겠다. 뒤따라 줄줄줄 달려오는 생각을 나열하다가 별거 아닌 척 또 물었다.
“우주… 에서 왔어요? 막 제가 이걸 어디에 제보하려는 건 절대 아니고! 제가 원래 우주를 좋아해서, 그 코스모스? 그것도 좀 읽어봤고 근데 그거 너무 어려워서 다 못 읽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약간 직접 살다 왔으면 잘 알 수도 있으니까…아.”
“너 되게 무서워하면서 거침없다.”
“불편하시면 얘기 안 해주셔도 돼요…….”
다리를 쭉 폈다가 그대로 벽에 등을 기댄 박지성이 이제노 눈치를 봤다. 봄에 들어와서 벌써 여름 끝물이었다. 에어컨 하나 안 돌아가는 교도소는 흡사 황토방 같았다. 땀이 흘러 목으로 타고 내리는 걸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았다. 다행히 여름엔 샤워라도 자주 할 수 있었다.
덥석 잡힌 발목에 힉 하며 상체를 일으킨 것도 그때였다. 이제노 손아귀에 잡힌 발목 한번 이제노 한번 번갈아 보던 박지성은 존나 바보처럼 뭐 뭐하세요 물으며 버벅거렸다. 이제노는 딱히 웃는 것 같진 않은 얼굴로 담백하게 손을 뗐다. 멈췄어. 그러니까 뭐가 멈췄냐고 물어보니 검지로 복사뼈 부근을 가리켰다.
“지금 네 종아리부터 발가락까지 노화. 멈췄어. 그때 봤잖아, 안 움직이는 거. 5분 뒤면 풀릴걸. 흐름을 멈춘 거야.”
이제노는 우주가 하나의 흐름이랬다. 물줄기랬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줄기가 있고 호수가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지금 멈춘 이 흐름은 작은 빗방울도 되지 않는댔다. 원래부터 그랬어요? 하는 질문엔 고개를 끄덕였다. 외계인은 기본 탑재 기능이 씹사기였다. 스마트폰으로 치면 갤럭시 최신 시리즈. 지구 사람들은 썩어 빠진 갤투 정도. 아니다 베가 레이서 정도겠다. 아무튼 그렇댔다. 정확히 외계인이라는 거다.
영원히 살 수도 있고 지금 바로 까무룩 죽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박지성은 죽음이 아득했다. 이제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너무 고차원적이었다. 시간도 멈출 수 있으면서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이제노는 할 게 없어서랬다. 할 게 없어. 왕욱이 형이 말하는 거 들었잖아. 알바 천국에서 이력서 넣었는데 인력소만 경럭 없는 사람도 써줬어. 숨만 붙어 있으면 되는 심부름 업체가 다른 말로 깡패인 건지 나는 몰랐으니까, 그냥 했어. 하다가 왔어.
그럼 형 지구엔 왜 왔어요?
나는 온 게 아니라 유배당한 거야.
이제노는 유배랬다. 외계인이 유배라는 말도 알다니. 그런데 들어보니까 정말로 유배였다. 이제노가 행성의 이름을 말할 때 나에겐 들리지 않는 언어로 귀에 들어오기 때문에, 간단히 말하자면 행성 갈비찜은 사랑 열풍이었고 사랑하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유배해 버린다. 이게 무슨 날강도 같은 공산주의 정책이야. 안 믿겼으나 거짓말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비슷한 영화를 본 것도 같았다. 근데 그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동물로 만드는 거였고. 이렇게 다짜고짜 베가 레이서 모여있는 세상에 던져버리진 않았다.
“그럼 사랑하게 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아마도. 그런데 내가 거기에서 살 땐 다들 안 돌아왔어.”
“와… 그쵸. 사랑을 아예 안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이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그것도 있는데, 사랑해도 안 돌아간대.”
“엥.”
고향과 사랑 중에 택하는 건가? 엄청 복잡했다. 박지성으로선 혼란스러웠다. 사랑이 뭔지 몰랐다. 이혼했다 재혼해서 자기 친아들한테 한 달 용돈 5만 원 쥐여주고 외박 좀 하라 들들 볶는 게 사랑에서 비롯된 거라면 존나 이기적이었고 구질구질했다. 과거사가 노란장판 갑이었다. 부성애 모성애 아 트위터 보면 없을 수도 있대. 만들어지는 거래. 이해는 갔으나 용서하기 싫었다. 없는 것에 가까웠다.
“형은 어떻게 할 건데요?”
“글쎄.”
찰나 굳었던 이제노의 표정이 금세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돌아온다. 박지성은 저 형 왜 갑자기 정색을 할락 말락 해서 사람 심장 쫄리게 하나 싶었다. 속으로 쿵 뛰었던 심장을 마음의 손으로 부여잡고 아니에요 형 공부하세요… 했다. 이제노는 대꾸 없이 책을 폈다. 어딘지 모르게 심통이 난 것도 같고 심기가 불편한 것도 같지만 배우 뺨 때리게 잘생긴 얼굴로 그것마저 분위기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작게 나 있는 <라> 호의 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쇠창살대로 그림자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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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하나님 인자와 자비 영원히
호식이 아저씨가 요즘 밤낮으로 부르는 CCM이었다. 주 경배해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호 일짱은 호식이 아저씨라 불교인 민석이 형도 아 그냥 부르는 갑다 하고 말았다. 회개하는 척 초코파이 받아 오는 줄 알았더니,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돼서 하나님의 어린 양을 자처하고 있는 호식이 아저씨는 10년 형을 받은 뺑소니 범이었다. 하나님이 반은 성공하신 거다. 뺑소니범 회개했네요. 그런데 반성하고 뉘우친다고 다 회개가 되나. 그럼 피해자는 억울해서 하나님 시발롬도 같이 묻어 버리려 할 것 같은데. 박지성은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목공 작업을 했다. 이제 나무판자 가르는 정도는 쉬웠다. 여전히 징징 울리는 기계의 굉음은 무서웠다. 그러나 참아야 하는 게 죄인의 삶. 무조건 버티자. 버텨. 버텨. 버티고 있었다.
이제 산책 시간마다 귀신처럼 그늘을 찾는 사람은 없어졌다. 여름이 지나고 공기가 차가워졌다. 하늘은 높아졌다. 구름이 전깃줄로 뱅뱅 감아놓은 담의 끄트머리에 걸려 있었다. 메이즈 러너의 미로처럼 담 위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노랑은 친해진 것도 같았다. 웃어주며 대화하다가도 갑자기 싸늘해져서 제노 형 이중인격인가 싶었던 적이 한두 번 아니지만 그래도 박지성은 나름 친하다고 생각했다. 뒷짐을 지고 트랙을 빙빙 도는 이제노 옆엔 박지성도 함께였다. 보폭 하나 차이. 비추는 햇살을 작살나게 가로막아 대비 명확한 콧대와 등 뒤로 겹쳐진 손을 보며 무슨 조선 시대 임금처럼 걷는다고 느꼈다. 드라마 세트장이라 해도 믿겠네. 확실히 외계인인 게 납득가는 미모였다.
“지성이 넌 나가서 뭐 하고 싶어? 조금만 있으면 금방 출소잖아.”
여전히 조금은 느릿한 속도로 걸으면서 박지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출소. 아직 가을인데 그게 조금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이제노 입장에선 조금만일 수 있어도 박지성은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왕욱이 형은 자꾸만 자신의 밑에서 일하라고 떵떵거렸다. 애기야 니 어리게 생겨서 무시당하고 산다. 어디 가서 좆 빠지게 고생하지 말고 형네 식구들 찾아가잉. 그 형들 좆나 잘생겼어. 니랑 나잇대도 비슷해. 그러니까 하우스 직원으로 뛰라는 건데 말이 직원이지 직원 일 좀 하다가 도박 중독 걸려서 인생 조지라는 뜻이었다. 그때마다 이제노는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에이 형 지성이가 어떻게 하우스를 가요. 나가서 돈 벌고 학교 가겠죠. 박지성은 대학 갈 성적도 안 되고 생각도 없었는데, 이제노가 그렇게 말해서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네네. 맞아여. 저 학교 가야져…. 그리고 속으로 물었다. 스스로에게. 이제노에게.
깜방이 아니어도 만날까. 사람 패서 들어온 이제노는 징역 1년 5개월. 박지성은 1년. 박지성의 출소가 더 빨랐다. 그러면 이제노는 나랑 한 번이라도 만날까. 깜방 동기니까, 게다가 비밀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만나서 밥이라도 먹을까. 박지성은 부대찌개가 별로지만 이제노가 엽떡 베라 싫어하고 두부 들어간 부대찌개 먹자고 하면 응할 의향도 있었다. 이제노는 시시한 이야기만 했다. 지성아 너 힘이 심각하게 약하다. 엄살도 심하다. 입술 물고 헐면 아파하면서 왜 계속 무는 거야? 현실과 지금. 절대 나중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이제노가 오늘 한 질문이 처음이란 것이다. 나중. 그리고 이 나중은 이제노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래.
“나가면, 일해야죠. 아 핸드폰 개통할 거예요. 전에 쓰던 거 쫓기다 넘어져서 액정 갈려가지고 아무것도 안 보여요… 흰 줄만 계속 뜨는데 못 쓸듯.”
“너 달리기도 잘 못 하잖아. 진짜 열심히 뛰었나 보네.”
“당연하죠. 잡히면 경찰서인데. 근데 잡혀버려서 결국!”
킥킥대며 웃은 이제노가 박지성의 뺨을 쥐고 주욱 늘렸다. 아 엉 머해여. 웅얼거리는 볼을 잡고 문질문질하다가 손을 떼고 빨개진 귓불에 시선이 넘어갔다. 아 진짜, 아퍼. 박지성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아프진 않았으나 괜히 볼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습관적 엄살이었다.
“버킷리스트 같은 건?”
“버킷리스트요? 저는… 음. 145살까지 살기? 형 세상에서 제일 최장수한 인도네시아 사람이 146살에 죽은 거 알아요? 근데 뭔가 제가 최장수면 좀, 부담스러우니까 2등 정도만 해도 좋을 것 같아서. 그런데 늙으면 그렇게 오래 살아 있는 게 싫을 수도 있겠죠? …헐 잠깐만, 형 혹시 몇 살이에요?”
이제노는 눈썹 끝을 축 늘이고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외계인도 지구 사람이랑 나이 똑같이 먹어…. 아 헉 글쿠나 죄송해요. 박지성이 땀 삐질삐질 흘리는 모션 같은 걸 옆에 단 사람처럼 안절부절 사과했다.
“지성아 너 포로리 같다.”
“포로리요? 그게 뭔데요?”
“포로리 몰라? 보노보노야 놀자.”
보노보노야 노올자를 한 옥타브 올려 따라 한 이제노가 눈을 껌벅였다. 박지성은 진짜로 몰랐다. 되도록 아는 척해주고 싶었는데 보노보노가 뭔지를 모르니까 장단 맞춰줄 수도 없었다. 저 형은 외계인이면서 이상한 걸 너무 많이 알았다. 머쓱하게 뒷머리를 쓸어내린 박지성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와하. 와하하. 아하.
버킷리스트야 당연히 있었다. 목록만 백 가지였다. 가장 중요한 게 ‘오래 살기’라서. 나머지는 버틴 뒤에야 이룰 수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잠시 잊고 산 것뿐이었다.
번뜩 생각난 50번대인가 40번대인가 헷갈리는 목표. 박지성이 걸음을 멈춰 섰다. 이제노의 상의 허리춤을 잡았다. 고개를 돌린 이제노가 입 모양으로 왜 물었다. 소리 내진 않았다. 왜. 박지성은 소리 내서 대답했다.
“저 여기서 이룰 수 있는 거 딱 두 개 있어요.”
“뭔데?”
“하나는 누가 저 면회 오는 거. 그런데 올 사람이 없어서 거의 불가능한 거예요. 이거 버킷리스트에서 이제 삭제하려고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음, 하고 뜸을 들이던 이제노가 다른 하나는? 물었다. 박지성은 한 박자 숨을 골랐다. 괜히 헛헛하게 뜨거운 기분은 아직 여름 햇빛이 하늘 위에 남아있어서라고 생각했다. 햇빛은 여전히 쨍한데 바람만 바뀐 거라고. 죄수도 가을을 타는 것 같았다. 여름이 지나 급격하게 바뀌는 계절은 심히 충동적이었다.
“키스, 해보는 거…?”
키스를 해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저게 좋은가. 혀랑 혀가 섞이는데 사랑을 느끼나. 애초에 사랑이 뭔데 혀랑 혀를 섞고 싶어 해. 영유아 시절에 봤으면 분명 징그럽다 느꼈을 행위를. 박지성은 단순하게 궁금했다. 깜방 가족들이 여자랑 떡친 얘기 하면서 히히덕거릴 때나, 떡치고 싶다고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뒤 대주자 같은 저급한 농담 칠 때나, 항상 성적인 긴장감에 의문을 품었다.
이제노의 눈 아래로 속눈썹이 그림자가 되어 그늘졌다. 새카만 눈알이 눈꺼풀에 의해 닫혔다가 보였다가 하며 박지성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또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운 눈빛. 냉기인지 온기인지 살기인지 모르겠는 시선. 박지성은 그게 혐오감인 줄 알고 풀이 죽었다. 아 키스하고 싶다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실은 이제노랑(최소 이제노 와꾸 정도인 사람과) 키스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말한 거였으니 흑심을 들켰을 수도 있겠다고 빠르게 단정 지었다.
“아 아니에요 형, 뻥이에요.”
“……”
“아 진짜로요…”
굳게 일자로 다문 입매로 침묵을 유지하던 이제노가 박지성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박지성이 보기엔 쟤가 교도소 들어와서 미쳤나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스무 살 먹고도 키스 한 번을 안 해본 모솔찐따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럼 안 되는데 자꾸 망상이 도지네. 남에겐 안 보이는 <지성 속마음 모션>으로 머리를 쾅쾅 쥐어박은 박지성이 잡고 있던 이제노 상의를 앙탈 부리듯 흔들었다.
이제노랑 키스해보고 싶은 이유는 사실 별거 없었다. 첫 번째, 잘생겼다. 두 번째, 외계인이다. 자고로 미남과의 키스는 어떤 영화에서든 먹히는 소재이며 시청률 급상승을 끌어내는 비장의 무기다. 외계인인 건, 박지성이 우주를 좋아해서도 있지만 특별함에 집착하는 약간의 오타쿠적인 판타지 때문이었다. 외계인이랑 키스. 그것도 존나 잘생긴. 평범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끌렸다. 박지성은 첫키스에 은근 집착하는 성미가 있었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좀 가자. 이제 산책 시간 끝날 때 됐어.”
꾹 붙잡혀 있는 자기 상의 셔츠 자락을 내려보던 이제노가 난감하다는 듯이 말했다. 박지성은 순순히 손을 뗐다. 아 헙 넹. 남은 트랙 반 바퀴를 중심으로 사람이 휑했다. 바로 반대편 옆 옆 방 정… 뭐시기랑 같은 방 김 뭐시기가 싸움 중이었다. 교도소 나가서 보자 시발롬아 그래 두고 보자 미친놈아가 난무하는 가운데 이제노와 박지성은 눈길도 안 주고 산책을 했다. 이제노는 원체 불구경보다 재밌다는 싸움 구경엔 관심이 없었고 박지성은 싸움 구경보단 외계인이 더 흥미로웠다. 그래서 손을 뗀 지 1분도 채 안 되어 다시 덥석 붙잡았다. 화들짝 놀라 멈칫한 이제노가 고개를 돌렸다. 놀란 토끼 눈 같은 놀란 외계인 눈.
“형 다시 형네 별로 돌아가고 싶어요?”
“갑자기? 내 별로 돌아가고 싶냐고?”
“네.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고향이면 생각도 많이 날 거고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엽떡 그리운데… 그렇다고 제가 엽기 떡볶이 집 아들인 건 아니고요.”
“글쎄. 돌아가면 좋긴 하겠지만.”
“형의 마음은… 돌아가고 싶을걸요?”
순 억지였다. 이제노도 그렇게 느끼는 눈치였다. 얘가 갑자기 왜 억지를 부리지? 왜 이러지? 외계인인 걸 빌미로 뭘 하려고 그러나? 따위의 생각을 하는 게 잘난 얼굴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제노 너머로 교도관이 호루라기를 삑삑삑삑 불어 재끼며 싸움을 말리러 달려가는 게 보였다. 그 옆에서 벤치 위에 올라간 호식이 아저씨는 주 경배해 경배해 노래를 불렀다. 좋으신 하나님 인자와 자비 영원히. 좆으신 하나님 싸움과 난장 영원히. bgm 선정이 좀 거지 같았다. 아수라장인 광경을 지켜보던 박지성은 이제노의 얼굴과 정면으로 마주한 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절레절레! 형은… 돌아가(고 싶어 해)야 해요. 왜냐면 박지성이 그걸 원했다. 그걸 원한다기보다는 다른 쪽에 관심이 넘쳤다.
“제가 사랑을 좀 알려줄게요……!”
그러니까 바로 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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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은데? 아니에요. 싫다니까. 안 싫을걸요. 지성아 너 사랑 해봤어? 사랑 안 해 봤어도 이론은 알아요.
3일째였다. 시도 때도 없이 졸랐다. 사랑을 알려주겠다고 존나 존나 잡고 늘어졌다. 이제노는 영혼이 빨린 듯이 지성아 너 고집이 왜 이렇게 세 물었고 박지성은 그거 하나 받아들이는 게 어렵냐고 되려 역정을 냈다. 이제노 입장에선 어이가 없다 못 해 있던 얼탱이도 출타할 노릇이겠지만 박지성도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마음먹은 건 해야만 했다. 사랑 단기 속성 과외를 빌미로 키스해야겠다고. 나는.
물류 분류 작업 중에 박지성은 기어코 이제노 옆자리를 차지했다. 앞에서 뒤로 넘어오는 물건들에 텍을 붙이며 시종일관 이제노를 째려봤다. 그만 째려보고 일해 지성아. 제노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틱틱거렸다. 와 솔직히 형을 위한 건데 나는 진짜 좋은 마음으로 제안한 건데 나 정말 용기 낸 건데 게다가 송교도관님… 아무튼 그거 뭐가 어렵다구. 중얼중얼거리는 걸 듣고 있던 이제노가 한숨을 짙게 내쉬었다. 그러면 또 조용해졌다. 개쫄보 박지성은 한숨 하나에 입을 닥치는 인간이었다.
“네가 굳이 그걸 알려줄 필요가 있어? 사랑은 내가 하는 건데, 너는 사랑도 안 해봤다면서 그걸 어떻게 가르쳐 줘. 아니면 내 능력으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전 바라는 거 없어요. 나는 그냥 쫌, 형을 도와주고 싶어요.”
“지성아 너 진짜… 골때린다.”
박지성을 바라보는 이제노의 눈이 너무너무 싸늘해서 이제 포기해야겠다고 느낀 때였다. 약간 심했나. 안 되겠다 방 들어가서 사과해야지. 이제 안 건드려야지. 그런데 이제노가 뜻밖의 말을 했다. 어디 알려줘 봐, 그럼.
이번에 얼이 빠진 건 박지성이었다. 진심이에요? 방금까지 서운하네 뭐네 찡찡거리던 애가 진심이냐고 묻는 게 기가 찼는 지 이제노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허. 박지성도 약간 머쓱하긴 해서, 부러 뒷덜미를 매만지며 변명을 덧붙였다. 아니 진심으로 준비가 됐냐고요……. 박지성을 바라보던 이제노가 준비 같은 게 필요는 한가, 싶은 얼굴로 대답했다. 응.
일단 박지성은 손을 잡자고 했다.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와 사랑을 느끼려면 손을 잡고 있어야 된다고. 싫다고 할 줄 알았던 이제노는 가만히 제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있었다. 종일 그러고 돌아다니니까 떡 쳤냐는 소리를 들었다. 라호 막냉이들 떡정 생겼냐 왜 저러냐. 호식이 형님 쟤네 서로서로 대줬습니까. 교도관님이 입 다물라며 말리긴 했지만 놀림은 멈추질 않았다. 박지성은 깜방 들어온 이후로 교도관에게 무한한 감사를 느낀 적이 그때 처음이었다. 형 이건 안 되겠어요. 주위 방해 공작에 의한 실패를 고했으나 여전히 손은 잡고 있는 상태였다.
다음으론 자문을 구했다. 확실히 알바도 경력직만 뽑는 이유가 있다. 경험이 중요한 거거든. 왕욱이 형 사랑할 때 어땠어요? 금왕욱에게 묻자 왕욱은 궁금하지도 않은 자기 어머니 얘기를 했다. 하우스 운영하다가 깜방 들어온 죄수가 꼭 출소 후 효도하노라 깜방에서 울부짖는 건 불효에 가깝지 않냐고. 게다가 사랑을 물었더니 무슨 엄마 얘기를 하고 있어. 들을수록 어처구니 없어서 무시했다. 애초 깜방엔 제대로 된 사랑을 하다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 고만고만하게 쓰레기 짓 하다 왔거나 고만고만하게 본인 개같은 인생 연명하느라 바빴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교도관님한테 물을 수는 없는 일이라 이것도 실패였다.
한 거라곤 떡정 생겼냐는 소리 듣기와 왕욱이의 불효 스토리 듣기가 다였으나 박지성은 어차피 그게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은밀하게, 그렇지만 수줍게 제안했다.
형… 키스해볼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이제노가 아아? 거렸다. 볼이 빨개진 채로 황급히 손사래를 친 박지성이 형 키스하고 사랑에 빠지는 영화가 전 세계적으로 아주 많다고, 인기까지 많아서 그런 류의 내용이 지천에 깔렸다고 열심히 주장했는데, 믿는 눈치가 절대 아니었다.
“싫어요…?”
“아니 지성아 그건 둘째치고, 우리 이제 막 씻고 나왔는데 그걸 여기에서….”
아. 장소가 문제라는 건가?
“밤에는요?”
“그건 너 좋은 거 아니야? 키스를 꼭 해야 돼?”
“무슨! 아니거든요! 하면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이제노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시선으로 박지성을 쳐다봤다. 박지성은 또 쫄보 본능이 숨 쉬는 것처럼 발동해서 아 싫으면 말구요… 이랬다. 안 마른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괜히 쭉 짜냈다. 괜히 눈을 빙빙 돌리는 중에 이제노가 박지성 나 봐봐 이래서 슬그머니 눈을 맞췄다. 무언갈 찾듯이 빤히 보는 눈. 탐색하는 것 같기도 하고 걸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외계인 아니지?”
“외계인은 형이죠.”
“응.”
“제가 외계인 같아요?”
“아니 혹시나 해서.”
미동도 없이 박지성을 보고만 있던 이제노가 손을 잡았다. 소, 손은 왜요. 순간 당황한 박지성이 빼내려 했으나 빠질 리가 없었다. 이제노는 힘이 겁나 셌다. 꿀꺽. 침을 삼키고 이제노를 쳐다봤다. 얼굴이 너무 진지했다. 진지하게 존나 잘생긴 점이 제일 큰 문제였다.
“여기에서 할 건 아니잖아.”
선풍기의 회전 날이 멈췄다. 저번처럼 정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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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시발 키스를 했다. 제안한 건 박지성인데 야한 소설 속 한 장면처럼 함락당한 것도 박지성이었다. 샤워실 옆 중앙 복도로 가는 통로였다.
이제노는 키스를 진짜 끝장나게 잘했다. 혀뿌리가 뽑히는 줄 알았다. 박지성은 혀를 섞으면서 속으로 욕을 존나 했다. 박지성의 의지로 했다기보단 장기 옆에 숨어있던 육두문자가 키스하면서 영혼이랑 같이 쑥쑥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시발. 시발. 씨발 존나 황홀했다. 할 줄 아는 욕이 존나랑 씨발 밖에 없는 게 아쉬울 정도로 다른 표현이 필요했다. 아랫도리가 묵직해졌다. 충격이었다. 키스만으로 발기하다니 나 사실은 엄청난 변태인가 봐. 그리고 이제노 얼굴을 봤는데 박지성은 자신이 변태인 게 아니라 이제노 얼굴이 오지게 야한 것임을 깨달았다.
헐은 입술에 이제노의 혀가 닿을 때마다 몸을 움질움찔 떨었다. 따가웠다. 문제는 따가움마저 일종의 쾌락으로 다가온 탓에, 그 결과 눈이 풀리기 직전이었다. 어깨를 잡은 손에 계속 힘이 빠졌다. 눈을 감고 키스에 열중하던 이제노가 박지성의 팔을 잡아 자기 허리에 둘렀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어느 타이밍에 숨을 쉬어야 하지? 배운 적 없는 거라 입이 떨어질 때마다 신음을 뱉었다,
축축하게 젖은 입술이 떨어졌다. 이제노는 살짝 원망스러운 낯이었다.
“이렇게?”
“……어, 네…”
이제노가 박지성의 볼을 쥐었다. 적당히 미지근한 손가락이 방금 씻어 부드러운 살에 닿아 감촉이 이상했다.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손길이었다. 웃지도 않았다. 고개를 꺾어 한숨을 푹 쉰다. 아… 묵직하게 내뱉는 복합적인 감정.
“박지성 너랑 있으면 자꾸 이렇게 돼.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다 알고.”
“제가 뭘 알아요?”
내가 아는 거라곤 형이 사랑을 몰라 유배당한 외계인이라는 거랑 키스하자는 개억지 부리니까 시간 멈춰 키스해준 말 잘 듣는 외계인이라는 거 두 개뿐인데. 박지성은 나름 억울했다. 알고 싶어 해도 안 알려주면서 뭘 다 안다 말하느냐고. 키스 땜에 진이 쪽 빠져서 따지지도 못했다.
마주친 눈을 지지 않고 바라봤다. 그러다 먼저 돌린 것도 박지성이었다. 이제노 너무 잘생겨서 계속 볼 수가 없단 말이야. 키스 한번 하고 나면 뭘 하든 첫 키스 상대 얼굴만 생각난다더니 진짜였다. 박지성이 눈을 떼도 한참 박지성만 보고 있던 이제노가 대뜸 손을 쥐어 왔다. 맞잡아 달라붙은 손바닥. 손가락이 파고들어 덮은 손등을 보면서 박지성은 확실히, 출소 후에도 이제노랑 두 번은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으로도 부족할 것 같아. 세 번은 만나야 할 것 같아. 왜냐면 첫 키스 상대니까. 다른 사람으로 사랑 깨닫고 우주 돌아가는 건 고소감이며, 이렇게 키스까지 했는데 나를 안 좋아한다는 건 무기징역감이야. 된통 박지성이 감겼다. 그래도 억울하진 않네. 타고난 촉이 좋은 편이었다. 눈치 보는 사람의 감으로 기민하게 알아챈다. 알 수 있었다.
이제노 나 좋아해서 저러나 봐. 하는 말만 들어도 쫌 궁예 가능이었다. 사실 맥락이라곤 전혀 없는 ‘이제노한테 사랑 알려주기 프로젝트’ 같은 걸 수락한 것도, 내가 귀여워서인 줄 알았는데 최소 호감 이상이라는 거지. 박지성은 연신 마른세수하던 이제노를 보고 있다가 슬쩍 말했다.
“스킨쉽이 효과가 좋은 것 같아요.”
“……뭘?”
“사랑에…? 아니 저한테 효과가 좋다는 건 아니고요.”
“……”
“……”
긴장감과 두근거림이 웃도는 표정. 와 웃음 터질 것 같애.
“더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키스를?”
“…그 이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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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없는 계절은 빠르게 지나갔다. 붙어먹느라 바빠서 체감상 그렇게 느낀 걸 수도 있다.
박지성은 한 달 감형을 받았다. 2월 29일 출소였다. 바로 3일 후. 4년에 한 번 있는 날 출소라니 좀 대박이었다. 쌀쌀한 공기는 여전해도 하늘이 바뀌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햇빛을 쐈다.
바닥의 냉기는 밤만 되면 급속도로 올라왔다. 불 꺼진 밤 다른 가족들이 코를 고는 동시에 박지성은 이제노 쪽으로 바투 붙었다. 가만히 누운 옆으로 슬금슬금 다가가 몸을 살짝 비틀어 모로 누웠다. 자나? 고요한 얼굴을 힐끔 살펴보다가 눈을 꾹 감았다. 이제노 손이 목에 올라오는 순간 번쩍 떠버렸지만.
“헉.”
“쉿…”
형 왜 안 자요? 잠들었다가 깬 거예요? 내가 와서? 얼른 다시 잘래요? 근데 형 오늘 자고 일어나서 이틀 뒤면 출소인 거 너무 안 믿겨요. 다른 사람들도 다 이래요? 소곤소곤 쏟아내는 박지성 말을 듣던 이제노가 푸스스 웃었다. 지성아 제발 자. 그만 말하고. 너 내일 바빠.
내일 왜요? 우리 내일 행사 또 있어요? 옆 방에 새로 온 애가 의정부 교도소 시설은 병신 같은데 행사는 좆도 많다고 했어요. 제가 생각한 게 아니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그렇게 말 한 거니까 오해는 하지 마요.
사람들 깨겠다….
아. 헐, ……
그리고 설마 했는데 역시였다. 면회실에 이제노가 떡하니 앉아 있었다. 바쁠 거라더니 이럴 줄 알았다고 박지성은 서프라이즈 알아맞히기 성공한 거에 자신만만했으나 표정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이 이 이럴 줄 알았어요(형이 왜 여기에 있어요!). 생각이 훤히 보이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마이크에 대고 입을 옹알거렸다. 이제노는 어이없다는 듯이 허허 웃었다.
“거짓말. 박지성 너 몰랐으면서.”
“진짜 진심으로 모든 걸 걸고, 알았어요. 바쁠 일 없다는데 바쁘다 하고. 나 면회 올 사람 진짜 없는데 면회라 하고. 그리고, 형은 외… 계인이잖아요!! 아니 그런데 시간 멈추고 나가서 이쪽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래도 돼요?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나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어요?”
“내가 너는 안 멈췄으니까.”
“와… 겁나 사기캐.”
얇은 강화유리창을 두고 봐도 얼굴은 변함이 없어서, 박지성은 형 새삼 엄청 잘생겼어요 이랬다. 그리고 서프라이즈 정말 안 어울린다고. 면회를 와 주다니 정말 형 답다고. 말을 이어 붙이자 이제노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딱히 감동한 걸 보고 싶은 건 아니었을 테다.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티가 나니까. 박지성은 감정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이었다. 사실은 엄청 기쁘고 눈물 나올 것 같고, 간절히 바란 적 없다 생각했는데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심장 부근이 화끈거렸다.
이제노가 대화 선빵을 쳤다. 나 탈옥할 거야. 정지된 교도관이 떡하니 뒤에 있는 걸 보면서 말하는 것치곤 심각하게 당당했다. 미쳤어요? 박지성이 묻자 교도관 담배도 뺏어 피웠는데 탈옥이라고 어렵겠냐는 황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탈옥 예고라니. 서프라이즈가 생각보다 훨씬 어마어마했다.
“형 5개월만 지나면 출소잖아요. 탈옥범으로 쫓기는 거 아니에요? 은행가면 지명수배자 명단에 형 얼굴 있고. 잘생겨서 팬클럽 생길 것 같다.”
박지성은 진심으로 진지했는데 이제노는 눈을 말똥말똥 뜨고선 나 외계인인데 그게 문제겠어? 말했다. 말이야 방구야. 문서 조작 같은 것도 가능하다 이거지. 금수저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수저였구나. 베가 레이서 세상에 떨어진 갤럭시 최신형은 살기 편한 거였다.
그것과 별개로 물어볼 기회는 지금뿐이란 걸 박지성은 알았다. 죄수복을 입은 이제노. 나랑 키스한 이제노. 나한테 페… 펠라도 해준 이제노. 사랑하지 않아 지구로 유배 온 이제노. 나를 위해 개깜놀 서프라이즈도 준비해 준 이제노. 겨울 내내 박지성과 사랑 같은 걸 한 이제노한테 박지성은 궁금했다. 우주로 돌아갈 것인지. 사랑하는 눈을 숨기지도 못하는 외계인이, 고향으로 갈 것인지.
만약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사형감이다. 형 다시 우주로 돌아가요? 차마 눈은 못 보겠고 마이크 쥔 손을 보면서 물었다. 그러다가 대답이 없으니 슬쩍 시선을 돌려 쳐다본 이제노 얼굴이 굳어 있어서 박지성 동공엔 존나 큰 지진이 났다. 사랑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박지성은 이제노를 이대로 못 보게 되면 아주 오래 그리워할 거라고 느꼈다. 우주로 갔을지 지구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형을 계속 생각할 것 같았다. 사랑이 어려운 것과 별개로. 아니 사랑이 그렇게 어려운 거라면 딱히 배우지 않고 감정대로 살래. 그렇게 결론 내렸다. 이기적이고 구질구질하지 않은 연애도 있을 거라고. 사랑은 정신병에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다. 인터넷에서 본 거라 딱히 믿을 만한 정보가 아닐 수도 있는데, 아무튼 그렇댔다. 스트레스에 대해서 박지성은 다시 곱씹었다. 정신적 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는 습관. 매년 헐어있던 입술 한 구석. 처음 깜방에 들어왔을 때 찢어진 입술이 낫지 않아 숟가락이 닿을 때마다 찌푸려지던 미간과 그때마다 안개처럼 스쳐 지나던 이제노의 눈 따위를.
“너 처음 봤을 때. 입소한 날, 교도소 나갈까 생각했었어. 나는 운명도 안 믿고 사랑도 안 해봤는데 어쩌면 믿을 것 같고 해볼 것도 같은 거야. 지성아 원래 폭풍 전야는 느낌으로 알잖아.”
“……”
“너는 사랑을 알려주겠다 하고. 미친 건가 싶었어. 우주에서 보낸 사람인 줄 알았어. 그런데 네가 뭘 하려는지 너무 잘 보여서 정말… 내가 단단히 잡혔구나 싶었는데. 난 우주로 못 가.”
우주로 못 가.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간다고 말했다. ‘안’과 ‘못’의 차이.
“왜요? 저 좋아해서요?”
“알고 있으면서 물어봐?”
박지성은 입소 첫날의 이제노를 상상했다. 되짚어 봐도 존나 잘생겼다는 감상평 외의 기억은 없기 때문에, 박지성을 보고 좆 됐다 느꼈을 이제노를 머릿속으로 그렸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을 이제노. 그러니까 박지성을 보고 쟤랑 있으면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을 이제노가, 흐름을 멈추고 담배 피우는 걸 들켰을 때 들었을 감정. 들켜서 큰일이고 들켜서 좋다고. 모순된 생각을 했을 외계인. 아니 어쩌면 자의일지도 몰랐다. 박지성은 멈추지 말자. 박지성은 놔두자. 들키고 싶으니까. 외계인인 걸 들켜 버리고 거미줄처럼 엮여서 불행같이 사랑을 느끼고 싶으니까. 본능과 행동이 따로 놀았을 이제노. 건축기능사 자격증 책보다 박지성이 더 눈에 들어왔을 이제노. 사랑을 알려주겠다 들러붙었을 때, 못 이기는 척 그럼 그래라 말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다면. 손잡았을 때 떨렸을까. 호모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망상병자라 해도 좋았다. 박지성은 과대 해석을 즐겨 하는 편이었다.
“형 저는 잘 살고 싶거든요. 막, 엄청, 건물주 이런 거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런 건 상대적인 거잖아요. 난 그런 것까진 안 바라구요. 물론 되면 좋을 텐데… 그냥 잘 살고 싶어요. 버티는 게 아니라 사는 것 같이 살고 싶어요.”
“……”
“그러니까요. 형이 오늘 여기 나가면, 저 데리러 올 거잖아요. 그럼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것처럼 나타나서 잘 살았냐고 물어봐요.”
“왜?”
“어차피 해줄 거잖아요.”
참나. 바람 섞인 소리로 웃는 이제노를 보고 3초간 생각하던 박지성이 유리창에 검지를 갖다 댔다. 형 이거 얼른 검지 붙여요. 외계인 만나면 지구인들은 이거 해줘야 돼요. 싫은데? 하고 일단 거절했던 이제노는 얼마 안 가 순순히 검지를 붙였다. 새끼손가락 거는 대신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약속이었다. 나가면 형은 출소처리 돼요? 아니 사람들이 아예 나를 모를걸. 형 나가서 만나면 제가 외계인 기본 탑재 능력 알뜰히 써먹는 방법 알려줄게요. 네가? 나 민증 훔치는 건 안 하고 싶은데. 아아아 그거 말고요.
문을 닫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박지성은 입술을 물었다. 씹는 버릇. 하필이면 이런 스트레스성 습관 같은 걸 몇 년간 달고 다녔다. 증상이 이제야 나타난 거다. 나가면 베라부터 가야지. 부대찌개 집을 지나 대리점에 가야지. 부모님 효도폰 꽁짜폰 같은 거 말고 아이폰 7 정도. 그리고 만나야 한다. 이번엔 정말로 잘 살 거니까. 유배되어 고향을 버린 외계인과 함께.